안종연(1952~)은 뉴욕 School of Visual Arts에서 Fine Art를 전공, 1992년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화비축기지 탱크.ONE(2020), 부산시립미술관(2015), 학고재화랑(2010), 가나화랑(1989), 부산공간화랑(2001)을 비롯한 여러 공간에서 20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창원국제조각비엔날레(2018), 광주비엔날레(1997), 부산비엔날레(2006), 인천여성비엔날레(2011) ‘점으로부터 점으로‘ 환기미술관(2007), ’물전‘서울시립미술관(2003), ’Visions in Between' 록펠러센터(뉴욕)을 비롯한 다수의 해외 기획전에 초대 출품했다.
1995년 이후 평면, 입체, 설치 등 안종연의 세계는 예술과 기술, 물질과 비물질, 조형과 개념, 시각예술과 문학 등 서로 이웃하면서도 경계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영역과 범주들에 두루 걸쳐있다. 그는 예술 영역에 발 딛고 서서 그 범주를 확장하는 예술인일 뿐만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영역을 이어주는 메신저이다. 그는 예술과 그 바깥을 두루 꿰뚫는 인터아트(Inter-art)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양식과 활동방식을 무한히 확장한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지금 걷고 있는 길, 그리고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 모두에 있어서 안과 밖을 넘나드는 탈경계의 상호성은 그의 삶과 예술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그것은 예술가의 지위를 상호작용을 통해서 협업하는 사유의 실천가로 재정립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종연은 탈근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예술을 열망하며 예술체제의 전환을 실천하는 통합과 통섭의 예술가이다.
Circles and lights. Glass globes suffused by light arranged in circles and semi circles. These are probably the first things we notice when we enter an exhibition of Moha Ahn. We stop and watch the colour of these lights slowly changes. This is hypnotic and a soothing thing to do. Eventually we move on and wander through the exhibition and realise how many other types of media she uses: projected light, lenticulars, sheets of mirroring material stippled with tiny holes to form an image, metal sculptures, and paintings made with epoxy resin. Yet we sense that these very various forms of making combine to embody and reveal one artistic vision or personality. At the heart of it there is an apparent paradox: although there is a lot of geometry, hard surfaces and engineering in her work the sensations she induces are more organic, lyrical and nature related.
원과 빛. 원과 반원들로 나열된 빛으로 뒤덮힌 유리 구슬들. 우리가 모하 안의 전시장에 들어섰을때 처음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이다.우리는 멈추어 서서 이 빛의 색들이 천천히 변화는 것을 본다. 이것은 최면 같기도 한 스며드는 무언가다. 결국 우리는 전시장을 방황하며 그녀가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들을 사용했는지 깨닫는다 : 투사된 빛, 렌티큘러, 이미지를 만드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가득 찬 거울같은 판, 금속 조형물, 그리고 에폭시 수지로 만들어진 그림 등.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결합된 다양한 형태들이 예술가의 비전과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함축되어 나타남을 감지한다. 그것의 핵심은 명백한 역설이 있다.: 기하학, 단단한 표면 공학의 많은 작품이 있지만 그녀가 유도하는 감각은 더 유기적이고 서정적인 자연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Let us think about circles first. If we go to the Kyobo Bookshop in Gwanghwamoon we find that Ahn has installed four circular sets of lights in the ceilings. The largest, near the entrance, has eight circles of lights, one inside another, and then surrounding these, at a distance like the outer planets, another three circles and, beyond these, like the asteroid belt, another two circles. How many lights are there? At the risk of seeming a nerd we try and count them but counting things when they are arranged in circle is always difficult for circles have no starting point - they just continue around - but if we count carefully we will work out that the outermost circle has 124 lights in all. This is a large amount of lights! In total there must be about 750 lights in all - and each is different. They are not mass-produced but are made one by one as unique objects using a technique patented by her - each has a different geography of bubbles trapped inside. If we can get close enough we will be intrigued to see these differences.
먼저 원에 대해 생각해보자.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면 천장에 4가지 빛의 원형들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 근처에 가장 큰 여덟개의 빛의 원들이 있고, 그 주변에는 외부 행성 같이 또 다른 세 개의 원이 있고, 그 뒤에는 소행성대 같은 또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 얼마나 많은 빛이 있는가? 겉보기엔 괴상해 보임에도 우리가 원으로 배열된 것들의 수를 헤아려보고자 한다면 시작점을 찾기가 어렵다. 끊임없이 돌고 있으니. 그러나 만약 우리가 조심스럽게 수를 세어 본다면 가장 바깥 쪽 원들이 모두 124개의 빛임을 알수 있다.이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다. 모두 다른 750개의 빛이다. 대량 생산을 하진 않고 그녀만의 특허 기술로 만들어진 하나하나 고유의 객체들이다. 각 구슬 안에 갇혀 있는 거품의 지형들은 모두 다르다. 충분히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차이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In Kyobo what will most likely arrest our hurried progress to find and purchase a book is that the lights are always slowly changing colour. Her work is subtle and undemonstrative, but these slow changes will eventually impinge on our consciousness. At one time all the globes may be white and then slowly they are suffused with blues, purples and maroons – these are soft colours: they glow gently but they do not significantly cast their colours on the environs. These colours slowly move around the rings in slow waves or pulses; in the centre these colours may give way to a very pale pink, or to an ice blue, or…. These are colours that cannot be precisely named. Our eyes have been caught in the slow, reflective passage of time, much as when, at the seashore, we are entranced by the way the waves flood across the shingle and then recede – and again – each time with subtle variations.
교보에서 책을 찾고 사기 위한 분주함 속에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 빛들이 항상 천천히 색깔을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섬세하고 내색하지 않는, 그러나 그 느긋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의식과 충돌한다. 모든 구슬은 한번 하얀색이었다가 천천히 파란색, 보라색 그리고 적갈색으로 변한다. 부드러운 컬러들이다. 구슬은 부드럽게 빛을 내지만 그 색이 주변에 영향을 미칠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이 색들은 느긋한 파동과 맥박으로 링을 따라 이동한다. 중심의 색들은 창백한 핑크색 또는 아이스 블루에 양보한 듯 한다. 정확히 명명하기 어려운 색들이다. 우리의 눈은 시간의 느린 반사 통로에 사로잡혀, 해변에서 조약돌 사이에 밀려왔다가 미묘한 변주를 일으키며 밀려가는 파도의 길목에 들어선 듯 하다.
Elsewhere in the Kyobo Bookstore however the set of rings near children’s section are, in contrast, bright and vivid. Strong primary colours and secondary colours: yellow, green, blue, purple, red, orange. These are colours that can be named. But in the three works in the areas for adult books the colours are gentler. She has worked hard over the years to make the LEDs she uses do softer, pastel colours. These shifting colours compared to those in the children’s section are more dreamy or meditative. What do we dream of? What state of mind, what ruminations does her work put us into? In nature what we see when we look up is the sky: do we dream of sky and space?.
교보문고의 다른 곳 아이들 섹션 가까이에 가면 대조적으로 밝고 선명하다. 강한 원색과 보조 색상 :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빨간색, 귤색.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색상들. 그러나 성인 도서를 위한 세 곳은 보다 부드러운 색깔이다. 그녀는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을 내는 LED를 만들기 위해 몇년 동안 노력했다. 이렇게 바뀌는 색상은 아이들 섹션과 비교해 보다 몽환적이고 명상적이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마음의 어떤 상태, 그녀의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반추를 하게 하는가? 자연에서 올려다보면 보이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과 우주에 대한 꿈을 꾸는가?
My earlier reference to planets was not unconsidered or accidental. Her work often looks like models of larger things, here it looks a bit like an orrery, a model of solar system. But they tend to be cranky and small where as because we become fixated or absorbed in looking at these four ceiling works they seem larger than they really are. The night sky is of course filled with globes and circles. We look up and we can get a sense of being elevated – of travelling vast distances. Because the bookshop has a rather low ceiling the full beauty and sense of recession in Ahn’s work is not as easy to appreciate as one would like. Of course, this sense of rising through the skies is not just phenomenological but metaphorical. In European Renaissance paintings by Fra Angelico and others the heavens are shown as stepped up just like these lights of Ahn’s, albeit not with globes, but with saints, angels and archangels, allowing our eyes, and by implication our spirits too, to rise. If we look at Buddhist images of heaven we find much the same recourse to circles and deep recession – Ahn is tapping into archetypal images here.
행성이라는 내 첫인상이 사려깊지 못하거나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작업은 태양계나 태양광 발전 시스템 보다 더 큰 가지의 모델 같아 보인다. 그들은 기이하고 작아보이는 경향이 있음에도,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천장 작업을 보다보면 우리가 마치 고정되고 흡수되는 것 같기도 하다. 밤하늘은 물론 구와 원들도 가득차 있다. 올려다보면 먼 거리를 유영한 듯한 상승되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서점은 천장이 다소 낮은 구조이므로 Ahn의 작업 전체의 아름다움과 침체의 느낌을 원하는 만큼 다 감상하기가 쉽진 않다. 물론, 하늘을 통해 상승하는 느낌은 현상학적이지 은유적인 것은 아니다. 유럽 르네상스 시기의 알제리코가 그린 그림이나 하늘을 그린 다른 작품을 보면 Ahn이 사용한 빛 같이 상승하는 듯하게 보여진다. 비록 구는 아니지만 성자, 천사, 대천사들과 함께 우리의 눈과 정신까지 상승하도록 말이다. 만약 우리가 하늘에서 불상의 이미지를 본다해도 비슷한 대응을 발견할 것이다. Ahn은 이 전형적인 이미지에 다가가고 있다.
Francesco Botticini, Assumption of the Virgin,
1475 – 1476, 228.6 x 377.2 cm,
National Gallery London
In Dante’s poem Paradise or Heaven is depicted as a series of concentric spheres surrounding the Earth, consisting of the Moon, Mercury, Venus, the Sun, Mars, Jupiter, Saturn, the Fixed Stars, the Primum Mobile and finally, the Empyrean or Godhead. (As in a circle, light and love enclose it, as it surrounds the rest and that enclosing,/only He who encloses understands - as Dante wrote) The final sphere surrounding God and enclosing all the other spheres is the primum mobile – the thing that gives all things motion - the angels. Allegorically, the poem represents the soul's ascent to God as through ascending these spheres or circles. (This echoes the, sadly, better known nine circles of hell.)
단테의 시에서 낙원이나 천국은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고정 별, Primum Mobile(제10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공 또는 신성으로 이루어진 지구를 둘러싼 동심 분야의 시리즈로 묘사된다 . (단테가 쓴 바에 따르면, 원의 경우에 빛과 사랑이 원을 둘러싸고 있고, 나머지 부분을 둘러싸고 봉해져있어, 오로지 그 만이 이해하는) 하나님을 둘러싼, 다른 모든 분야를 둘러싼 마지막 영역은 Primum Mobile이다.-모든 것들에게 운동성을 부여하는 - 천사. 비유적으로, 시는 이 구 또는 원들의 상승을 통해 하나님께 영혼의 상승을 표현한다. (이 에코는, 슬프게도, 지옥의 아홉개의 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The circle is often a symbol or perfection, harmony and unity: many once believed in the Music or Dance of the spheres, a concept that gave the whole universe order, unity and harmony. (In the West the belief originated from Pythagoras, that the mathematical proportions that underlie music also underlie the planets and that they made music. Such music was echoed by the stately harmonious dance of the spheres around each other.) Certainly there seems something musical about Ahn’s works with their rhythmical changes of light and this is made explicit in the installations where a soundtrack is integral.
원은 종종 완벽, 조화, 통합을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이 천상의 음악이나 춤이 있다고 믿으며, 그 개념은 우주의 질서, 통일성, 조화를 의미했다.(서양의 믿음은 음악의 기저를 이루는 수학적 비율, 피타고라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음악은 위풍당당하고 조화로운 천상의 춤으로 표현된다.) 리드미컬한 빛의 변화와 배경 음악이 필수적인 설치물인 Ahn의 작품에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
Circles imply unity and harmony: look at the flag of the European Union or of the Republic of Korea. It is such a basic shape. A circle (a single line joining up with itself) is one of the first two coherent marks we draw – the other being the cross – a line bisecting another line. Perhaps this connects to that instinct deep inside us that impels us to, from Stonehenge to Richard Long, also inscribe circles in nature. Circumambulation, walking or dancing in circles, is also recurrently used as a motif of harmony or unity in rites and ceremonies.
원은 통합과 조화를 함축하고 있다. 유럽 연합이나 한국의 국기를 보라. 아주 기본적인 원의 형태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원은, 다른 선으로 이등분 될 수 있는 두개의 표시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크로스 표시(X나 +)- 아마도 이것은 우리를 압박하는, 우리 안에 깊이 내재된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원으로 묘사되는 스톤헨지부터 리처드 롱의 작품까지 말이다. 순행, 동그랗게 걷고 춤추는 것 또한 어떤 의식이나 기념식에서 조화나 화합의 모티브로 사용된다.
In Ahn’s work these circles of lights are very often cut in half or even, when placed in the corner, in quarters. But it is very easy for us to imagine the circle carrying on invisibly through and beyond the wall. This sense of hidden order is also implicit, but less obvious, in the lenticulars where the initial apparent overload of kaleidoscope forms gives way to a central more organically formed circle. From the very start of her career it seems she was always making circles: when asked she smiles, she cannot explain why, but it is true, she says: “the circle, the horizon and the verticals are the core elements of my work.”
Ahn의 작품에서 이러한 빛의 원들은 종종 반으로 나뉘거나, 심지어 코너에서는 4등분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벽을 통하거나 넘어서 눈에 안띄는 원을 상상하기는 쉬운 일이다. 이런 숨겨진 질서에 대한 감각은 최초에는 만화경의 형태로 적재되었다가 중앙으로 갈수록 유기적으로 원을 형성한 렌티큘러 작품에 암시적이고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을 보면 그녀가 항상 원을 만들었던 것 같다.그 이유를 물어보면 웃으면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말한다. “ 원, 수직, 수평은 내 작업의 핵심 요소들이다.”
As we stand in the bookshop someone asks, “Is this art or design?” It is a reasonable question and one that one can and must respond to in two ways, firstly by emphasizing the specialness of art and secondly by showing now in certain situations or ways of thinking art and design become, if not synonymous, accomplices to a shared task. Basically if we think of the lights at Gwanghwamoon they do not just fit in with the architecture and design elements, when we look at them we forget about everything else around them: they are self-contained – they absorb us. Once we realise how complex these clusters of changing lights are we begin to question what meanings and intentions they have. Each of the four sets of lights is both formally coherent, and an organic whole. They are not design elements. One could not take anything away from them, size, scale, form, colours, without destroying their character and wholeness. In contrast, the design elements around them are irritating in their arbitrariness and profusion and could be removed or changed without ill effect.
우리가 서점에 서 있을때 누군가 와서 묻는다. “ 이게 예술입니까? 디자인입니까?” 정말 이유있는 질문이고 누군가 두가지로 답할 수 있고 답해야만 한다면, 첫째로 예술의 특별함을 강조하고, 두번째로 비슷하지는 않지만 공통된 작업으로 보이는 예술과 디자인이 되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생각하는 법을 보여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광화문에서 빛을 생각한다면, 건축이나 디자인 요소로만 쓰이는게 아니다. 우리가 빛을 보면 우리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망각하게 된다. 빛은 자족적이고 우리를 흡수한다. 변화하는 빛의 무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이 가진 의미와 의도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다. 빛의 사이즈, 규모, 형태, 색깔중에서 그 특성이나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다. 이러한 빛의 4가지 특징은 모두 일관성 있고 유기적이다. 이것들은 디자인의 요소가 아니다. 반대로 디자인의 요소들은 그것의 독단성과 풍족함이 다소 거슬리기도 하고 해가 안된다면 제거되거나 변화될 수 있다.
Art is always special. It is self-reflexive, conscious of being different, conscious of being without function – except to make us think and feel. Of course art can have some function – Ahn’s lights although they do little to illuminate the space below do act as a set of fulcrums for people to move around - like landmarks.
예술은 항상 특별하다. 예술은 자기 성찰적이고 다름을 알아채고, 우리를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능적이지도 않다. 물론 예술이 몇가지 기능을 가질수도 있다.- Ahn의 빛은 사람들이 돌아다닐수 있게 받침대 역할을 하며 공간을 비춘다. 랜드마크처럼.
When we visit exhibitions of Ahn’s art we see that her installations are full of circles. Though, invariably, they are in rectangular rooms, she seems to want to soften and blur their harsh corners. However complex these arrangements of globes are the circle is always unobtrusively dominant. To enter into an Ahn installation is to enter a realm of circles that overlap and glow within each other. The glass globes are encompassed by circles or ovals of projected light. It is as if she is trying make a more organic space or secret room, or a nest, inside the cold geometry of the gallery’s rectangle.
Ahn의 전시장을 방문했을때 설치물들은 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전시장은 직사각형이지만 그녀는 각진 코너까지 부드럽게 보이고자 구성했다. 그러나 구들의 복잡한 배열은 은밀하게 원이 지배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중첩되고 빛을 발하는 원의 영역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유리 구슬들은 원과 프로젝트에서 쏘는 타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사각형의 차가운 기하형태를 보다 더 유기적인 공간, 비밀의 공간 또는 둥지처럼 만들고자 노력 한 것 같다.
The novelist Kim Min Sook writes of how entering one of her installations is like stepping out of a space ship into an alien landscape. There is very certainly a sense of entering a very different, special sort of place. My first thought when I entered her installation at the Aram museum was that I wished I had entered it fifteen years earlier with my daughter when was still young enough to experience the sense of wonder that comes more naturally to a child than an adult. It felt like a garden but with the sand spread across the floor, a desert garden where the plants had been distilled into lights.
소설가, 김민숙은 그녀의 전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비행선에서 내려 걷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곳은 매우 다르고 특별한 공간의 느낌이다. 아람미술관의 그녀의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딸이 충분히 어렸을 15년전에 이곳에 왔었더라면 어른 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 공간의 신비로움을 경험했을텐데 싶었다. 바닥에 펼쳐진 모래가 정원 같은, 빛으로 여과되어진 식물이 자라는 사막의 정원같은 느낌이 들었다.
In that installation the projection was over a mound that could be imagined as either a hill or an extended belly – as burial mound or pregnant woman. That is probably an ambivalence she is happy with. (However sensuously beautiful these works are they are filled with images of birth and death, and motifs of time and mortality.) The images projected on to this mound were like those of a kaleidoscope or of an opening flower. To me they recalled the way the sea anemone’s mouth opens and closes. “Is this place an undersea place?” I wondered. It seems an unworldly but welcoming place.
프로젝션은 언덕이나 부푼 배 정도로 상상할 수 있는 모래더미를 비춘다.-고분이나 임신한 여성의 배 같은- 그녀가 행복을 느끼는 양면성일지도 모른다. ( 그러나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이 작품들이 탄생과 죽음의 이미지, 시간과 필사의 모티프로 가득하다.) 이 모래더미에 투사 된 이미지는 만화경 같은 또는 활짝 핀 꽃 같다. 그들은 나에게 아네모네의 입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떠오르게 했다. "이 곳은 해저인가?" 궁금하다. 그곳은 마치 환영의 장소로 보인다.
“I have used sand as a base for this installation because it is composed of silica like glass,” she told me. But I was more taken by metaphors and images: the pulsing of microbial life or star systems. We can read all her works as models of vast systems or of tiny ones: planets and suns, or atoms and molecules.
“나는 이 설치물 바닥재로 쓰인 모래도 유리의 원료인 실리카를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은유와 이미지로 생각되었다 : 미생물의 생명이나 태양계의 맥박.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 또는 작은 것들의 모델로 그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행성과 태양, 또는 원자와 분자
Images of exhaling and inhaling are persistent. The room seemed to be breathing. The light seemed to breath, rising and falling rhythmically like the chest of a sleeping person. (To reiterate what I said earlier, what is so intriguing about her work is that though very “engineered” it is so organic and human.) If God or the divine appears as light in all those images of the Heavens, then spirit often appears as breath. Pneuma is the Greek word for breath and is used as the word for spirit (Ezen in Korean) in the original translations of the Bible. This connection, unstated but implicit, between breath, spirit and light is a very useful principle in understanding her work. Whether you want to find these connections and experiences spiritual, therapeutic or solely aesthetic is open.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는 호흡의 이미지는 지속적이다. 방은 호흡할 것 같았다. 상승하다가 잠자는 사람의 가슴처럼 리드미컬하게 떨어지는 것이 마치 빛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 내가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자면, 그녀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유기적이고 인간적으로“설계”한다는 점이다.) 하나님 또는 신이 하늘의 그 모든 이미지를 밝은 부분으로 표시하면, 정신은 호흡의 형태로 자주 나타난다. 뉴마는 호흡이라는 그리스어고 성경의 원래 번역에는 영혼이란 단어 (한국어 Ezen)로 사용된다. 호흡, 영혼과 빛 사이의 무언의 암시적인 이 연결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원칙이다. 오로지 미적 감각이 활짝 열렸을때나 영적 치료에서 이러한 연결고리나 경험을 찾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In the writings of John Muir, founder of Yosemite national park, on our need to be in nature, we find an association of light and breath making us one with nature. (My associations as an English person are primarily with Western thought and culture, but, firstly, these are universal experiences of being in the world that are referred to, and, secondly, I am sure someone could find equivalent thought and creations in Korea or Asia.)
요세미티 공원의 창립자, John Muir 의 글에서 우리를 자연과 하나로 연결하는 빛과 호흡의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여기서 서양인인 내가 말하는 연결고리는 주로 서양의 생각과 문화이긴 하지만 첫번째로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경험이고 두번째는 한국이나 아시아에서 누군가 같은 생각과 창작을 했을거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Similarly but more grandiosely, Richard Wagner derived from Schopenhauer and his play on how he Hindu word atman for soul being so like atmen or breath in German the word Welt-atems (world-breath) as key term for the end of Tristan und Isolde where the heroine dies ecstatically singing:
비슷하지만 더 거창하게, 리차드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그의 연극에서 쓰인 영혼을 뜻하는 힌두어 atmon과 비슷한 atmen을 호흡을 뜻하는 독일어 Welt-atems (세계-호흡)을 트리스탄 앤 이졸데의 끝에 여주인공이 황홀하게 노래하며 죽는 장면에서 중요한 용어로 등장시켰다.
(In the surging swell, in the ringing sound, in the vast wave, of the world-breath, to drown, to sink, unconscious, utmost bliss!)
Bill Viola, who has always been interested in states of inspiration and ecstasy, tried to create a visual equivalent in his 1995 Tristan project. However, Ahn is not given to such megalomaniac endeavours as Wagner or Viola. Hers is always an understated, calming presence: unlike Wagner’s Isolde she has no desire to expire dramatically ion stage – as an artist she is too reticent for that. More importantly, she places the viewer as the one experiencing things, watching, absorbed, the colours slow change or standing immersed in the installation.
(밀려오는 파도, 울리는 소리, 거대한 파도, 세계 호흡, 익사, 가라앉다, 무의식, 극도의 팽창!)
항상 영감과 황홀경의 상태에 관심이 있는 빌 비올라 (Bill Viola)는 리차드의 1995 년 트리스탄 프로젝트에 시각적 정보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Ahn은 바그너 또는 비올라 등의 과대 망상적 노력을 하진 않는다. 그녀의 것은 항상 절제된, 고요한 존재감이 있다. : 바그너의 이졸데와는 달리, 그녀는 극적으로 ion 무대를 만료하려는 욕망이 없다 - 예술가로 그녀는 너무 말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는 설치된 작품을 보고, 흡수되고, 색상의 느린 변화를 경험하며 몰입할 수 있는 위치에 관람자를 배치했다.
피터 웨이벨이 말하길, ‘ 1920-30년대 빛 실험, 재료박스를 라이트박스로 변형하던 것, 물질적 안도감에서 가벼운 휴식 - Lásló Moholy-Nagy에서부터 Zdeněk Pešánek 까지- 예술에서 빛을 사용하는 실질적인 근거로 인식된다. 그러나 예술에서 사용하는 인공적인 빛의 사용 이전에, 컬러 이론, 컬러 기관, 초창기 필름 등이 있었고, 공감각 (여러가지 감각이 혼합된 경험)을 끌어내는 것도 추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예를 바그너의 gesamtkunstwerk 이나 J.K. 위스망스의 소설‘꺼꾸로’(A Rebours) 에 나온 장기 냄새 묘사에서 볼 수 있다.And before such fin de siècle obsessions we find Joseph Wright of Derby’s 1766 candlelight painting A Philosopher giving that lecture on the Orrery, in which a lamp is put in place of the sun. 여덟 명의 사람들이 금속 굴렁쉬 밖에 모여있고 그들의 얼굴이 태양에 반사된다. 모두 이 광경에 넋을 잃고 깊은 환영의 세계로 빠져든다. Wright는 새로운 과학적 시학에 매료된 진보적인 사상가와 과학자 그룹인 Lunar Society의 일원이 되었다. Ahn은 분명 과학과 공학을 즐긴다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그녀에게 외계인 같은“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그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유리구슬들이 만든 마법의 원안에 우리를 넣고자 노력한거 같다.
1995년 이후 평면, 입체, 설치 등 안종연의 세계는 예술과 기술, 물질과 비물질, 조형과 개념, 시각예술과 문학 등 서로 이웃하면서도 경계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영역과 범주들에 두루 걸쳐있다.
그는 예술 영역에 발 딛고 서서 그 범주를 확장하는 예술인일 뿐만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영역을 이어주는 메신저이다. 그는 예술과 그 바깥을 두루 꿰뚫는 인터아트(Inter-art)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양식과 활동방식을 무한히 확장한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지금 걷고 있는 길, 그리고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 모두에 있어서 안과 밖을 넘나드는 탈경계의 상호성은 그의 삶과 예술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그것은 예술가의 지위를 상호작용을 통해서 협업하는 사유의 실천가로 재정립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종연은 탈근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예술을 열망하며 예술체제의 전환을 실천하는 통합과 통섭의 예술가이다.
하얀 유리 구슬들의 합창, 장엄한 오케스트라, 빛의 소리가 들려온다. 빛나는 별들의 세계, 안종연의 왕국이다. 작가는 직접 유리 구슬을 만들어 그 안에 LED 장치를 부착시켜 오묘한 빛의 향연을 연출한다. 작가가 얻은 특허 기술이다. 다채로운 빛의 발광은 곧 <빛의 영혼>이다. 빛에 영혼이 있다니! 작가의 제작의도를 암시하는 제목이지 않을 수 없다. 만화경 작업은 이 점을 분명하게 들어내 준다. 다양한 문양의 집적, 그 화려하면서도 중첩된 무늬의 세계는 경이로움, 바로 그 자체이다.
만화경은 또 다른 만다라의 세계, 빛의 퍼레이드이다. 이 같은 빛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존재와 비존재 그러니까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하나(生死一如)라는 담론을 조형적으로 풀어낸 것인지 모른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시간이 있다. 시간의 축적, 그것이 우리네의 일생이다. 그 시간이 자아내는 소리와 빛, 안종연의 세계이다.
안종연은 평면 유화작업으로부터 거대한 스테인리스 조형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상을 보였다. 그는 다양한 매체 활용이라는 특징을 보여 왔는 바, 특히 근래에 이르러 알루미늄 판의 점묘(點描) 그림을 비롯 액체 에폭시 작업 혹은 레틴쿨러 작업 등,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키네틱 아트는 빛과 소리까지 장악하고 있어 예술적 발언의 진폭은 매우 넓다. 이번 아부다비 개인전의 제목은 <빛의 날개>이다. 안종연의 진면목을 한자리에서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경이로움의 세계, 관객은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빛에 날개를 달았으니, 이제 저 푸르른 창공을 향하여 비상하는 일이 다음의 수순일 것이다. 빛나는 별 하나씩을 가슴에 담고 시간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일이다. 시간에도 주름이 있다. 빛에 영혼이 있다. 이는 안종연 예술의 빛나는 매력이리라.